시체 발견 속도

2025. 4. 1. 12:28humanity/omerta

 

 

내 시체는 몇분만에 발견될까?

 

 

 

이런 상상을 종종 하곤 한다. 왜냐하면, 시체의 발견 속도야말로 그 사람이 생전 얼마나 사랑받았는지에 대한 지표가 아닐까에 대한 생각 때문이다.

아무리 주변에 사람이 많고 사랑받아 보였던 사람도 사실 매일같이 연락하거나 찾아와주는 사람이 없다면 다 썩어 문드러져서 몇 달만에 발견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게 연락하는 사람이 없던 고독사나 다름없을 게 뭘까. 나는 아마 농담이 아니라 한 달 다 되어가서 발견되지 않을까? 아마 엄마의 반찬 보낸다는 연락에 답장이 없자 엄마가 언니에게 나의 안부를 물어보고, 언니는 카톡으로 요진짱 왜 답장이 없어 하면서 내일 집에 들러도 돼? 이러한 흐름으로 오겠지.

만일 나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런 글에 또 적잖이 놀라겠지만, 애석하게도- 아니 낯간지럽게도 나는 그 어렸던 초등학생 때부터, 어쩌면 태어났을 때부터, 어쩌면 세상에 태어나 우렁차게 울었던 순간부터 이런 감정과 같이 공존하여 살아온 사람이다. 기뻐서 태어난 것이 아니라 슬퍼서 태어났을 것이다. 보통의 사람에게 발생하는 단순하게 한 번 피어올랐다 사그라드는 불씨같은 기분이나 감정이 아니다. 스스로 느끼기에는 약이나 상담 따위에 ‘치료’될 악의 불씨가 아니다. 나의 자아가 생기기도 전에 나에게 자리잡아 동행해왔던 슬픔의 감정을 그 누가 측정해볼 수 있을 것인가?

무엇이든 싹을 잘라내지 못하고 가만히 냅두면 티눈도 커지고, 암도 커지고, 불도 커지고, 물도 불어서 터지고… 그런 자연스럽고도 자연적인 수순이 아닐까?

나라고 이걸 고칠 방법이 없나 생각해보지 않았겠어? 별 짓을 다 해보았지만 당연하게도 이 슬픔이 해소되지 않았다. 초등학생 때부터 행복을 배우기도 전에 자해를 했다. 덜어내지지 않는다. 아무리 기쁨을 끼얹어도. 나의 슬픔은 당신들이 가늠할 수 있는 그 무엇보다 훨씬 거대하다.

 

고등학생 때 나와 비슷한 친구와 나눴던 말이 있다.

“나는 서른 살 전에 죽을 거야.” 버킷리스트라고도 할 수 있지. 인생은 한 치 앞을 모른다더니, 나야말로  기대 중이다. 내가 과연 이것을 이룰지 죽지 않을 더 큰 기쁨을 맞이하게 될지… 이후로는 그 친구가 자신이 원하는 대로 행복해지기 시작하고 나서 나는 나의 슬픔을 옮기지 않기 위해 연락을 끊었다.

 

어릴 때는 이런 우울한 얘기를 하면 참지 못하고 먼저 떠나가는 친구들이 이유 없이 미웠다. 결국에 ‘진심으로 사랑받지 못한다’로 귀결되기 때문이었을까? 그럼 서두에 서술했듯 시체의 발견 시간이 늦어지게 되겠지. 그런 생각 때문에 내 시체가 썩을까 봐 어릴 때는 두렵기라도 했나 보다. 머리가 좀 굵어지고 나니 웃기게도 신경이 쓰이지 않기 시작했다. 세상 사람들은 원래 그런 것이라는 걸 어느 순간부터 깨달았다. 오히려 그것으로 증명되었으면. 내가 사랑받는 사람이어 보였지만 사실은 전혀 아니었다는 것을 증명해냈으면… 그래서 잠들 자격이 충분해 보였으면.

아... 자연의 아이가 되고 싶다....